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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알리고 싶은 이야기

신사참배와 하나님의 종

 

과거 일제시대 때의 신사참배를 돌이켜보면서 앞으로 나타날 짐승의 표에 대해 생각….

신사참배와 하나님의 종  (출처http://www.seonjija.net/seon/?document_srl=1719)

일본제국주의자가 조선을 강제로 지배할 때,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그 후에 중일전쟁과 더불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되자, 비상시국에 모든 국민들이 정신적으로 통일되고 총동원이 되어야 한다고, 일본의 우상 천조 대신의 신사(神祠)를 조선 각지에 만들어 놓고, 모든 국민들로 그곳에서 절을 하고 섬기도록 하였다또 일본 왕인 천황(天皇)은 신이니 이를 경배해야 한다고 하여 일본 왕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게 하는 동방요배(황거요배)를 하도록 하였다

이런 일에 대하여 목사들이나 기독교인들이 처음에는 다 우상숭배라고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세상 권력자와 하나가 된 어용 기독교 지도자들을 앞 세워서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조상숭배의 미덕이라고 말하면서 반대하는 사람에게 대하여 핍박을 더 해갔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니 먼저  1936년 감리교, 천주교 등이 먼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닌 '국민의례'라고 통과를 하고 신사참배를 하였다

 신도(神道)

일본국민과 황족은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직계자손이며 특히 천황은 현인신(顯人神)이어서 일본 천황은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 신사(神社)를 세우고 온 국민으로 하여금 경배를 강요하였다. 역대 천황과 왕후의 혼령과 무사들의 영혼을 섬기도록 하였다. 그러나 장로교는 계명을 범하는 죄요, 우상숭배라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이럴 때 일제는 협박을 하기를 지위를 가진 사람이나, 사업체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다고 하였다. 목사에게는 강단권을 빼앗는다고 하였고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목사에 대해서는 노회에서 제명하고, 강단에서 몰아내고 사택을 빼앗고, 가족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이런 무서운 핍박에 수많은 주의 종들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학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학교 등록을 취소한다고 위협했었다.

그래서 기독교장로교를 만든 김재준 목사와 당시 조선신학원(, 한신대학교)의 학교 이사장으로 있던 3대 부통령까지 지냈던 함태영 목사는 서울 남산신사에 가서 머리를 숙였었다그러면서 함태영 목사를 말하기를 "하나님, 어서 속히 이 남산에서 이 일본 놈의 귀신을 쓸어버리고 여기에 예배당이 서게 해 주시오. 그리고 어서 속히 독립되게 하소서..." 속으로 그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글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이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이다

신차 참배 당시 조선 최고의 문필가인 김인서는 자신이 가진 잡지사 때문에 신사참배를 거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과 이런 대화를 1938년에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김인서: 4,5년 감옥 고생을 겪은(3.1독립만세사건) 나는 다시 감옥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아니하여 신사참배 문제에는 나서서 싸우지 못하고 회피하고 이렇게 숨어 있으니 부끄럽습니다...단번에 칼로 찔러 죽이는 핍박이라면 나도 나설 수 있을 것 같으나 다시 감옥살이는 못할 것 같습니다...또 나는 글 쓰기 시작인데 붓을 던지기에는 아직 미련이 있습니다.

주기철: 나는 감옥에서 죽겠군요...
김인서: .. 주 목사는 순교하실 각오입니까!

이런 대화에 몇몇 젊은 신앙인들이 김인서의 집 대문에다가 "주님보다 잡지를 더 사랑하는 김인서여! 회개하라" 써 붙였다고 합니다김인서는 나중에 회개하기를 "신사참배에 대하여 항전하지 아니하고 물러선 것은, 먼저 살아 남아서 글 쓰고 싶은 욕심에서요, 둘째로 3.1옥고를 생각하고 두 번 다시 감옥생활을 감당할 용기가 나지 아니함이요, 세 번째는 소학생 이하 네 아이를 부탁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신사참배모습                                                                                                

그러면 신사참배를 한 함태영 목사, 김인서 이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3.1 만세 운동 때 독립선언을 한 대표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넘어진 것은 그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었다. 그래서 주님은 계13:10에 말씀하시기를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을 쓰는 자는 칼에 망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 무엇이든지 주님과 진리보다, 더 크게 여겨서 붙잡은 것이 있다면 그 붙잡은 것으로 인하여 그는 마귀에게 붙잡힌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을 낚는 낚시입니다. 이래서 주님이 눅 14:33에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사로잡는 것이 있으면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칼은 세상의 전법을 말한다환난이 올 때 세상 전법을 쓰는 것이 지혜로운 것 같지만, 결국은 세상 전법으로 인해서 망하고 만다. 그 당시도 처음에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총독부와 타협을 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도리어 설득 당하는 교파까지 생겼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선교사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나왔다. 그러다가 일제의 압력이 점점 공포 분위기로 가자, 대부분 아예 '신사참배' 쪽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1938년 제27차 조선장로교 총회(장소: 평양 서문밖 교회, 총회장 홍택기, 부총회장 김길창)에서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또 총회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라고 가결을 시켰다. 그리고 바로 김길창 목사는 23명의 노회장들을 데리고 평양 신사에 가서 시범적으로 신사참배를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많은 목사들이 일본에 가서 시범적으로 신사참배를 하였고, 또 어떤 목사들은 부산 송도 앞 바다에서 일본우상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세례까지 받기도 했다.

일본에가서 시범적으로 신사참배를 한 목사들

 

 

부산 송도 앞 바다에서 일본우상 천조대신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는 목사들


이렇게 넘어진 사람은 당시 총회장, 부총회장, 노회장, 유명한 교회의 목사들, 장로들이 줄줄이 넘어졌었다. 함태영 목사, 김재준 목사, 심지어 한국사람이 가장 존경하였던 한경직 목사 같은 분도 신사참배를 하고 말았었다이러니 성경을 잘 모르는 어린 성도들은 지도자들의 변절에 줄줄이 죄인 줄도 모르고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이 수없이 나타났고, 또 꺼림칙하지만 윗사람들이 하니 스스로 자위하면서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경직 "한경직 목사를 만남", <한국기독교와 역사>, 1991, 151.
      
템플턴상 수상 축하회 석상에서의 신사참배 고백

김재준, "장공 김재준 박사의 회고", <한국기독사연구> 5, 1985. 12, 6.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신사참배가 분명히 죄 인줄 알았지만, 신사참배를 한 것은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빼앗기기가 두려웠고, 또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가 두려웠고, 가정의 단란함이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되거나, 나중에는 죽기가 두려워서, 알면서도 진리와 영감으로 살지 못하고 넘어졌던 것이다. 넘어지고도 그것이 잘못인줄 아는 사람은 그래도 낫지만, 스스로 자기 합리화하고, 또 나중에 해방되어서도 그것을 감추고, 합리화하는 그런 사람이 더 많았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도 신사참배는 계명을 범하는 죄라고 설교하고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신앙의 종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부는 신사참배를 피하여 중국 등 외국으로 갔지만, 그러지 않고 국내에서 반대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른 사람들이 많았다. 어두운 시대에 빛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신사참배 거부한 사람들

주기철 목사, 박관준 장로, 안인숙 선생, 최상림 목사,
김익두 목사, 손양원 목사,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이인재 전도사 등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최봉석, 주기철,
  
박관준, 최상림 


 

최상림 목사 (1945. 5. 6일경 평양에서 순교)

"
인생아 자유 있느냐 있거든 살지며
 
인생아 자유 없느냐 없거든 죽으라
 
차라리 이 몸이 청산에 무덤이 될지라도
 
자유 없이 살기는 원치 않노라."

박관준 장로 (1945. 3. 13 순교)

"
사람은 한 번 죽을 때가 있나니, 어찌 죽을 때 죽지 않으리.
그대 홀로 죽을 때 죽으면, 길이 죽어도 죽지 않으리.
때가 와 죽을 때 죽지 않으면, 살아서 즐김이 죽음만 같지 못하리라예수 나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 위해 죽으리라."

  人生有一死 何不死於死
  
君獨死於死 千秋死不死
  
時來死不死 生樂不如死
  
耶蘇爲莪死 莪爲耶蘇死

 최봉석(최권능) 목사

1869
년 평양출생. 1913년 평양신학교 5회 졸업밤에는 기도 낮에는 "예수천당"을 외치며 전도. 전도 않는 목사는 벙어리 목사라고 함. 1939  신사참배거부로 투옥. 6년 동안 감옥생활. 1944. 3. 1 - 4. 10까지 40일 금식 기도후 병원에서 별세. 75.

 손양원 목사

1902
년 경남 함안 출생.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나환자교회인 여수 애양원 교회 시무. 언행일치의 목사. 1940년 구속 후 5년 간 옥고를 치르고 해방으로 석방. 여순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이 순교. 1950. 9. 28 공산군에서 순교 당함. 초대 고신 교단 총무. 손양원 목사는 1943 5 17 1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구속 된지 3년 만에 출옥할 예정이었으나, 신사참배를 비롯한 이른바 "전향(轉向)"을 거부하여 다시 무기 구금 언도를 받게 되어 석방이 취소되었다.

1943
5 17일 형 만기 며칠 전

요다 검사 : 저 사람 사상이 개준 할 희망이 있는가?
           
요사이 그 사람의 태도가 어떤가? 신사참배는 잘 하는가?
손양원 목사: 아니오. 신사참배는 해본 일이 없습니다...
           
나를 가둔 당신들이 헛수고 한 것이오.
요다 검사: 잔소리 마시오. 그런 방종스런 소리하면 만기되어도 출옥은 고사하고  구금소  신세를 하게 될 것이오. 전향(轉向,뎅코)해야 나간단 말이야.
손양원 목사: 검사는 전향(뎅코)이 문제지만, 나는 신앙(信仰,싱고)이 문제외다.

 주남선 목사
"
살아있는 순교자"라고 부름. 1888년 경남 거창 출생. 1919년 거창교회 장로. 1930년 평양신학교 졸업. 거창읍 교회에서 목사로 22년간 시무. 신사참배로 7년간 옥고를 치룸. 1946년 고려신학교(現 고신대학)설립. 1951 64세로 별세.


 
한상동 목사

부산태생. 1937년 평양신학교 졸업. 초량교회, 마산문창교회, 평양산정현 교회, 부산삼일교회 시무. 신사참배반대로 1940년 구속. 해방 후 출옥. 주님선 목사와 고려신학교(現 고신대학)설립. 고려파(현재, 고신) 설립.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신사참배 출옥성도 안이숙-
 
내일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험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잡아 주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좁은 이 길 진리의 길, 주님가신 그 옛길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갑니다.
성령이여 그 음성을 항상 들려줍소서.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 말게 하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주신 소명 이루소서.

만 왕의 왕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만 백성을 구속하니 참 구주가 되시네
순교자의 본을 받아 나의 믿음 지키고
순교자의 신앙따라 이 복음을 전하세
불과 같은 성령이여 내 맘에 항상 계셔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주여 지켜 주옵소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역사적 성격과 의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핍박이 교역자와 성도들을 중심으로 개별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러다 보니 대부분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다 무너지고 말았다처음 1930년대 초기에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총독부의 양해를 구하는 선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오히려 역으로 총독부에 설득당하는 교파까지 생겨났다. 그리고 신사참배가 본격화된 1935년 말경에는 선교사들이 앞장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의타적인 성형도 일부 나타났다. 그러다가 일제의 압력이 증가하자 아예 생각을 바꾸어 일제에 '순응'하는 쪽으로 기울던가, 정면으로 항거하기보다는 은거, 회피하여 모면하려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이 시기에 순교를 각오하고 신사참배 거부항쟁을 한 신앙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이미 교단적으로는 일제에 굴복한 뒤에 대부분 개인적 차원이나 신앙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응은 적지 않은 순교자까지 냄으로써 신앙의 증거를 보여주었지만 소수에 그쳤다. 신사참배 거부 문제는 교회사와 민족사에서 다음과 같은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는 세속권력을 절대시하고 신성시하는 천황숭배와 신사숭배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당시에 세속권력에 굴복하여 타협하는 공교회의 변질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개혁하려 하였다는 점이다.

셋째로는 타민족을 식민으로 지배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지배체제를 부정하고 이에 항거하였다는 점이다.

앞으로 우리에게도 이런 환난의 밤중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환난의 밤중이 와도 넘어지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실력 준비를 평소에 해야한다. 이런 환난을 통과하는데 세상의 어느 것도 도움되는 것이 없다. 아무리 사교술이 좋고, 정치술이 좋고, 권력층과 좋은 관계를 가졌다고 해도 그것으로 밤중을 넘는데 도움이 안 된다. 그런 것을 의지하던 사람들 신사참배 때 다 넘어졌다.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성경을 다 외워도 소용없다. 신사 참배의 밤중이 올 때는 한국 기독교에 빛을 잃지 않고 신랑 되신 주님과 결합을 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다 쓰러지고 말았었다. 수십 년 신앙 생활한 사람도 넘어졌고, 유명한 목사님들도 퍽퍽 쓰러졌었다. 나중에 회개를 한 사람도 많았지만, 그러나 뒤에 회개를 한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한 번 꺾여진 나무 가지는 싸매어 주어도 그 흔적이 영원히 남는 것이기에...

출처: 교회사 강경수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