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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알리고 싶은 이야기

혼인잔치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

 

마태복음22:1-14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많은 사람들이 혼인 잔치 비유를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쉬운것 같지만 구원과 관련된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왕은 하나님을, 왕의 아들은 예수님을, 1차와 2차 초청에 보낸 종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을, 3차에 보낸 종들은 신약시대의 복음전도자(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선교사나 목사와 같은 사역자들)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혼인 잔치는 천국잔치이며, 특별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위한 어린 양의 혼인잔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1차와 2차에 초대를 받고 거절한 자는 유대인들이며, 나중 3차에 초청에 응해서 그 잔치에 참여한 자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여기 이방인들이란 문자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고 영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 마치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열외계층 들입니다. 요한복음 1:11-12 에 나타나 있는 말씀과 같습니다.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유대)에 오매 자기 백성(유대인)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참고로 7절 말씀은  AD70년에 로마의 티도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진멸 당함으로서 성취되었습니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신랑과 신부는 나오지 않고 임금님과 하객들만 나옵니다. 신랑과 신부는 어디에 갔을까요? 신랑신부는 이사야 26 20절에 나오는대로 chambers안으로 들어갔다고 봅니다.

그럼 지금부터 혼인잔치의 비유를 구원의 관점에서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혼인잔치에 초청장을 받고 참석한사람은 분명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이방인들이라 할지라고 앞에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밭을 사서 또는 소를 사서 (지금시대의 말로는 비즈니스)  또는 장가들어서 참석을 거절한 사람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라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혼인잔치에 참석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복을 설명할때 예수님의 의의 옷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것, 복음의 옷 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복음을 들었으나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럴듯하지만 문맥상 맞지 않습니다. 방금 설명한대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초청장도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예복이 무엇일까요?  천국문앞에서 쫒겨나는 억울함을 당해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울며 이를 갑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간다는 표현을 여러번 하셨는데 그때 전후 상황을 보면 매우 억울한 경우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한 두 가지만 찾아보면 누가복음 13:26-27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쳤나이다 하나…….너희는 밖에 쫒겨난 것을 볼때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쳤는데 그래서 천국갈줄 알았는데 쫒겨나니 너무 억울해서 이를 부드득 부드득 가는 상황입니다.

 

마태복음 25  양과 염소의 비유, 한 달란트를 땅에 파묻었던 무익한 종은 모두 슬피울며 이를 가는 상황입니다.  자기는 잘했다고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쫏겨나 슬피울며 이를 갑니다. 전혀 뜻밖의 상황을 맞이 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임금이 베푼 혼인잔치의 상황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아 쫒겨나서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울며 이를 갑니다.. 이것도 역시 매우 억울한 상황입니다. 자기는 천국잔치에 당연히 참석할 줄 알고 왔는데 황당하게 수족을 결박당해 쫏겨나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를 갈고 또 갑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예복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칭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르치실려고 돌에 맞을 각오를 하시며 장황하게 임금님의 혼인잔치를 설명하셨을까요? 

 

계시록 197-8절에 보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나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

마태복음에서 비유로 설명하신 혼인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입니다. 그때 예복은 결혼예복인데 그것을 계시록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결혼예복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이고 그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예복과 혼인잔치에 나오는 예복이 조금 다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근본은 같다고 봅니다.)

형용사가 두개 나옵니다. 빛나고 깨끗하다 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의 세마포를 빛나고 깨끗하게 하는 것일까요? 다니엘서에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은 별처럼 빛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하는 것은 회개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씻는길 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을 좀더 풀어놓은 것이 마태복음 718-20절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 불에 태우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나무는 열매로 알아 보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좋은 열매를 맺을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가 요한복음 15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 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열매를 저절로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라버리므로 사람들이 모아다가 불에 태운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열매는 예수님 안에 있을때 저절로 맺히는 열매를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좀 부족하니까 행함을 더하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구제도하고 헌금도 하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해서 행함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신자일수록 입으로 말하기를 믿음으로 구원받지 행함으로냐? 은혜로 구원받는다 라고 주장하지만 속으로는 나정도는 되어야지! 나는 별로 죄 지은 것도 없어! 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께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어떤 신자는 마음에 생각하기를 마음만 드리기는 너무 미얀하니까 뭔가 쪼금 해야겠다 라고 생각해서 약간 행함을 보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원수로다 라고 하며 모든것이 십자가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뒤로 숨는것을 큰 믿음인 척 합니다. 게다가 어떤이는 그 작은 행함도 입이 근질거려 나팔을 불어댑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5 35-4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염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그 행함의 동기가 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는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기 때문에 또 내가 주인으로 모시는 그분을 사랑하므로  그리고 또 나는 종이니까 주인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선다는 그 믿음대로 나의 삶이 순종함으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성령의 열매를 말씀한다고 봅니다. 그런 성도는 자기가 할것을 다한 후에도 나는 무익한 종에 불과합니다 라고 고백을 할뿐이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그러면 열매를 맺기위해 어떻게 하면 가지에 붙어 있을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방법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복음157절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된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은 1장에 보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안에 거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됩니다.

 

계시록 3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는 말씀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만 말씀안에 거하지 않는 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제말 너희 마음을 열고 내가 너희 안으로 들어가게 해다오라고 말입니다.. 성경지식만 갖고 있지 말고, 미지근하게 있지말고 말씀안에 거하며 그 믿음을 나에게 뜨겁게 보여달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토하여 내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토하여 내친다는 말씀은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상한 음식을 잘못 먹었거나 소화가 되지 않을때 토합니다. 내 몸에 일부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몸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아담의 아내가 아담에게서 나왔듯이 예수님의 신부는 예수님의 몸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토하여 내친다면 혼인잔치날 들림받는 신부는 둘째치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매우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하는데 쉽게 흘려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면 어떻게해야 예수님과 동거동락 할 수 있을까요?  그 길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성경에 씌여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안에 주인노릇하면 예수님이 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십자가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안에 살아서 역사하실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살아 있는 신자에게 절대로 예수님이  주님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죽어야만 양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내가 주인됨을 포기하겠다는 선언 입니다. 말로만이 아니고 실제로 행동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214절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믿는다 하지 말고 그 믿음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한국 속담에 말로 떡을 하면 세상사람들이 다 먹고 남는다고 합니다.  입술로는 주님 사랑해요 하면서 몸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그런 믿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할때 비로소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로마서 12 1절에 사도바울이 말씀 한대로 나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8 1-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구원의 약속입니다. 결코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사탄이 시비도 걸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혀 주십니다.  이런 사람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2 14절에 청함을 받은자는 많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겠노라 하며 교회 나오는 사람은 많되, 택함을 받은자,   성도의 옳은 행실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자는 적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과 일치하는 말씀이 누가 복음 13 24-28절에 나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고 좁은문을 찾는 사람들은 예수믿는 사람들이고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은 좁은 길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믿고 넓은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좁고 협착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절에 보면 주 앞에서 먹고 마시고 가르침을 받았으니까 분명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행악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고

 

 

또한 마태복음 7 22-27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무너짐이 심하니라.

 

어떤 분은 이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이 신학적으로 논쟁이 많은 부분이라고 하며 설교하시기를 꺼려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갖고 신학적으로 논쟁을 한다면 이미 그 신학은 변질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진리는 받아 들이는 것이지 인간이 만든 학문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것이라고 성경말씀에(딤후3:16)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레마와 로고스로 나눌 수 있습니다. 레마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고 로고스는 그외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모든 말씀위에 있는 말씀으로 최상위 권위에 있습니다. 사도들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을 덮어쓰거나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럴분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게 성경해석을 한다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며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 분은 성경을 변질시키는 것임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계시록 2218-19절에 나와 있습니다. 분명 사도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깨닫고 있었으며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렇습니다. 문제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성경원문과 번역본(한글 또는 영어)를 대조하지 않거나 그 당시 그 말씀을 하게된 전후상황을 재현해보지 않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도 그렇습니다. 영어로는 그냥 계시록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록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전체가 레마인것입니다. 계시록에 일곱번 반복해서 나오는 짐승의 표를 상징으로 해석한다면 레마가 상징으로 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절대로 허공에 사라지는 상징이 아닙니다. 이것을 상징으로 해석한다면 그런분은 생명책에서 삭제될것이 분명하다고 계시록 2218-19절에 나와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반드시 계시록 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안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기 저기서 문자만 따와서 연결해 놓고 믿기만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물탄복음, 반쪽복음 또는 가짜복음입니다. 

 

어떤 사람을 이렇게 말을 합니다.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달라고 한마디 하고 구원받지 않았나?

 

그 상황을 보면 믿었던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모두들 예수님이 구세주가 아닌가보다 하고 실망하는 마음 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그 강도는  자기처럼 십자가에서 피흘리며 고통받고 죽어가는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이 깨달아 졌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예수님을 모독하는 다른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자기가 영원히 죽을 죄인이라는 것이 깨달아 졌습니다. 이제 곧 죽을텐데 지금 이 예수님께 부탁하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간다는 것이 깨달아 진것입니다. 그런데 염치가 없으니까 자기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달라고는 못하고 기억해 달라고만 하였습니다. 그 강도는 회개하고 있었으며 그 상황에 그 믿음은 진실했을 겁니다. 그 강도가 살아났다면 풍성한 열매를 맺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신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강도에게는 그에 합당한 열매만을 구하셨습니다.

 

그 강도는 복 받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의 구원이 복음의 전부인것처럼 생각한다면 아직 기독교의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강도의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것을 원하신다면 언제 어떻게 악 소리도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지만 죽기 직전까지 내 멋대로 살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입니다. 로마시대 때에 십자가 형에 해당하는 사람은 도망친 노예나 로마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뿐 입니다. 이 두가지를 제외하고는 살인자라도 십자가형에 처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강도라고 번역한 헬어어 원문을 보시면 그 원뜻은 레지스탕트(λῃσταί (lēstai))  입니다. 즉, 로마 식민지에 대항해서 이스라엘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란 뜻이지요. 한국 문화로 바꾸어 말하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했던 김좌진 장군과 유관순 열사가 예수님 양쪽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들은 바리세파의 열심당원들이며 경건하게 생활 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올바른 복음 즉,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고 영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입니다. 4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반드시 열매를 찾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복음에서는 열매를 선택사항 정도로만 이야기 합니다. 구원에 필수요소라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쫒겨나지 않는 열쇠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열매는 억지로 갖다가 붙인 조화같은 가짜열매가 아니라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히는 그런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그 열매를 보시고 우리에게 그 예복,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혀주십니다.

 

믿음좋고 설교 잘하시는 목사님이 술 담배를 즐겨한다면 제대로 된 성도라면 아무도 그 목사님이 담임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나 자신도 믿는 사람의 행함을 보고 그 믿음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판단합니다.  하물며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함을 보고 믿음을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믿는대로 행동이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고 나쁜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힙니다. 내가 정말로 구원받은 성도인지 종교인인지 깊이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누누히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무너짐이 심하니라.  아멘.

 

 

주님 다시오심을 사모하는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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