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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알리고 싶은 이야기

정말 한번 구원은 영원한 것일까?

어떠한 사상이나 정치 또는 수학 방정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들면, 어떤이는 말하기를 공산주의가 이데올로기는 좋은데 실천을 잘못해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온 것입니다. 이유는 인간의 속성중에 하나인 강한 소유욕을 무시했기 때문이지요.

카톨릭이 타락한 것은 믿음 대신 행함만 강조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처음엔 그렇지 않았겠지요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의 생각이 첨가 되어 예수님의 의보다 자신의 공로를 더 중요시하게 되었고 급기야 면죄부까지 판매하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이에 반기를 들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을때 빼어든 칼은 오직 믿음 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 후, 행함 즉 성화를 제자리에 돌려놓지 못한채 성경의 구원관을 교리화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리라는 틀안에 가두어 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성경을 인용하고 교리에 맞게 성경을 해석하게 되었지요. 많은 신학자들이 말하기를 교리=성경이라고 합니다그리고 그 교리에 한번구원은 영원하다는 구원론이 추가 되고  이것이 진리처럼 인식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어 결국 현대교회는 원색복음과는 거리가 있는 교리화된 설교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고 봅니다.

현재 기독교는 타락의 극치로 내달리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카톨릭으로 몰리고 있는 현실이 되었습니다중세 카톨릭의 타락보다 현대 기독교가 더 타락 했다고 하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신뢰도가 오히려 무종교인들 보다 못하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과를 볼때 우리는 현대 기독교의 교리에 문제가 없는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교리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리는 성경을 압축한 것이므로 문제가 없는데 그 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교회와 목사 그리고 교인들이 문제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논리는 공산주의가 실패했을때 하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이데올로기(교리)는 틀림이 없는데 실천하는 사람이 문제다 이거죠.

현대 구원 교리에는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보험같은 것이지요. 사고가 나도, 집이 무너져도 보험이 있으면 걱정하지 않습니다. 구원교리에 보험같은 안전장치가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보장 되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번구원은 영원하다는 교리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성도의 견인설 같은 것 이지요하나님은 사람의 폐부까지 감찰하십니다. 인간의 이런 속셈을 모르실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원색복음은 결코 한번구원이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구약 구석구석에 나와 있습니다. 오히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도 찍혀 버릴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2: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있는 자가 범죄하면 그를 생명책에서 지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3: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신약시대에 이제는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바꾸어 말하면 지는 자는 생명책에서 반드시 지우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왜 목사나 교인들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원인은 욕심입니다편하게 립 서비스 한번 하고 구원 받고 싶은 욕심, 명예 욕심, 죄를 지어도, 폭언과 폭력을 사용 해도, 하나님 말씀에 무관심 해도, 세속에 물들어 있어도, 돈에 파묻혀 있어도, 폭리를 취해도, 사기를 쳐도, 야동을 보아도, 성추행을 해도, 간음을 해도, 세금을 포탈 해도, 세습을 해도, 말씀을 도적질 해도 나의 구원은 영원하다. 구원을 이루어 놓았으니 이제 세상의 욕망을 채우고 싶은 욕심그러니 교리에 맞는 말씀만 골라서 해석하고 설교합니다. 그리고 교리에 맞지 않는 부분은 얼려 놓거나 증발시켜 버립니다. 교인들도 이런 설교를 오히려 더 좋아합니다세상에서 힘들었는데 교회까지 와서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겠지요.

 

이것이 바로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는 교리의 함정입니다. 인간의 죄의 욕망, 타락하고 싶은 본성을 무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엄청난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음을 쉽게 표현하면 구속과 구원으로 나눌수 있는데, 구속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동의나 도움을 전혀 배제한체 홀로 이루어 놓으신것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럼 구원은 무엇인가요? 구원은 구속을 믿고 받아들이고 나의 삶은 U턴을 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즉 칭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중간에 타락하고 돌아오지 못하면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나 개개인의 책임입니다구속=구원이 아니라 구속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고 구원은 우리 개개인의 책임이라는 것 입니다.

구속과 구원을 이해하고 나서 성경을 읽으면 그동안 난해했던 구절들이 모두 풀리게 될 것 입니다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이런 구속과 구원의 과정이 잘 나와 있습니다로마서는 아브라함이 구원으로 가는 칭의 과정을 사도 바울이 신학적으로 잘 풀어놓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여진 것임으로 전혀 모순이 없고 논리적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논리적이십니다문제는 해석을 내 편의대로 하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은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에 의해 이단자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원색복음 그대로 해석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주신 분이 그 원뜻을 해석해 주시니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욕처럼 들렸을 겁니다.

3년 반을 농부의 심정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었건만 그들은 끝내 돌이키지 아니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단절 선언을 하시고 화있을 진저, 화있을 진저, 화있을 진저 하셨습니다. 400년 만에 맞은 하나님과의 회복의 기회를 놓치고 지금까지 2000여년 동안 단절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신학자와 목사는 어떻습니까? 성경의 원뜻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 연구해 보지도 아니하고 이단자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11: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천국가고자 하는 목사와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구원과 심판의 기준은 인간이 만든 교리가 아니라 성경 말씀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목사나 교인이나 모두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때 교리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무작정 예수님이 좋고 성경 말씀이 꿀송이 처럼 달게 느껴졌을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 날에 화를 당하는 목사와 교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  원색복음을 붙잡고 끝까지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죄와 싸워 이기는 자가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예수님의 신부가 될 것 입니다.

마라나타